유치원에서부터 시작한 피아노, 그것이 내 음악의 원점 이번 인터뷰는 오노 유지씨로부터 소개받아서 하는것인데 작업상의 인연은 별로 없었던 거 같습니다. 단지 대학생 때 저도 재즈피아노를 쳤으니까 옆자리의 학생동지의 인연같은건 있었습니다. 오노씨외에도 재즈를 하다가 작곡가가 된 분들로는 스즈키 쿠니히코씨라던가 조금 이후로는 무라이 쿠니히코씨 등도 계시고 말이죠. 제가 재즈를 본격적으로 시작한것은 아오야마 대학의 동호회에 들어가고 난 이후입니다.
고등학교 시절, 선배가 시부야의 재즈 카페에 데려가서 좋아하게 됐습니다. 마일즈나 아트 블래키 등 모던재즈가 가장 잘 나가던 시대로 피아니스트로는 윈튼 켈리, 레드 갈란드가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흑인재즈보다도 데이브 브루벡 등의 쿨 재즈같은 쪽을 좋아했습니다. 당시는 아르바이트로 간간히 심바시나 긴자의 그랜드캬바레에서 피아노를 쳤습니다. 오노씨처럼 미군 캠프를 전전하는것은 상당한 실력자에요.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한것은 레이난자카 유치원 시절입니다. 당시 이 유치원에는 오오나카 토라지씨의 아드님으로 동요작가인 오오나카 메구미씨가 선생님으로 계셨습니다. 기본적으로는 클래식 피아노이지만 미소라 히바리씨라던가 가요곡도 좋아했습니다. 초등학교부터 줄곧 아오야마 학원 재학이었는데 개신교계 학교여서 주1회로 학생예배때에 피아노 반주를 맡는다던가 문화제가 있을때는 '모정' 등 영화음악을 메들리로 연주하기도 했습니다. 그로부터 '조율'을 음악선생님께 배우곤 했으니까 예술대학의 피아노과에 진학하고자 한 적도 있습니다. 뭐, 원서를 넣었어도 안 됐을테지만 말이죠(웃음). 중학교 시절의 동기로는 도쿄교향악단에서 지위자를 하는 아키야마 카즈요시씨가 있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나서는 음악과 관계있는 직업을 희망했기에 야마하에 지원했는데 우연히 당시 폴리돌에서 근무하던 선배로부터 '외국음악의 디렉터를 모집하고 있다'라는 이야기를 듣고는 응모해봤더니 비교적 빨리 내정이 결정되서 입사했습니다. 음악관계이외의 회사도 지원했기에 여차했으면 음악과는 관계없는 일을 하고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스기야마 코이치씨와의 만남, 프로 작곡가로서의 출발 당시에는 재즈외에도 프레슬리나 팻 분, 다이나 쇼어 등 인기팝스를 라디오로 자주 들었습니다. 옛날에는 스테레오도 가구에 버금가게 거대해서 한번에 4, 5장의 레코드가 들어가는 오토체인지식의 장비로 레코드를 들었습니다. 폴리돌에서의 디렉터 시절에는 일본에서도 비틀즈가 인기였지만 타사(도시바EMI)의 아티스트였고 세일즈가 굉장해서 분해서 솔직하게 들을 수 없는 부분도 있었습니다(웃음). 음악적인 의미로 이른바 '비틀즈 세대'라는 것은 저보다 젊은 마츠모토 타카시씨 등의 세대가 아닌가 합니다.
작곡이나 어레인지를 시작한것은 아오야마 학원의 선배로 작사가인 하시모토 준씨로부터 '한 번 해보면 어떻겠나?'라고 권유받은 것이 계기입니다. 당시 하시모토씨는 스기야마 코이치씨의 매니저 겸 작사가를 하고있었고 스기야마씨는 후지TV의 음악방송의 디렉터를 하면서 곡을 써서 그룹 사운드를 팔려고 했습니다. 작곡공부라는 이유로 일이 끝나면 코다이라시의 스기야마씨의 집에 가서 아침 3~4시까지 곡을 만들거나 하면서 이노카시라 공원 근처에 있는 하시모토씨의 집에서 대충 자고 출근하는 터무니없는 생활이었습니다. 당시 스기야마씨는 무서워서 말이죠(웃음). 무서울 정도로 듣는 귀도 좋아서 인기가수분들도 스기야마씨 앞에서 노래할 때는 부들부들 떨었습니다. 스기야마씨와의 작업은 스튜디오에서 예고없이 실행됐습니다. 싱글의 B면을 '한 번 해보겠나'라고 말하셔서 보면을 만들고 바로 스튜디오에서 녹음. 긴장했지만 책상에서의 이론보다 공부가 됐습니다.
1960~70년대의 외국음악의 영향 '외국음악 그 자체로는 가요곡으로서 난해' 곡을 의뢰받는 만남에서 디렉터로부터 '다음에는 이런 느낌으로'라고 지시가 있었지만 해외의 여러 음악에도 영향을 받았습니다. 당시에는 다이애나 로스가 슈프림즈에 재적하던 시절의 모타운이나 버트 바카락, 카펜터즈의 A&M, CTI나 VERVE같은 무드뮤직풍의 재즈 등, 여러 음악이 실시간으로 나왔습니다. 그 후 보사노바도 유행했으니까 60~70년대에 음악을 하던 이들은 모두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요?
외국곡을 듣는 와중에도 어떻게하면 일본에서 잘 팔릴지를 모색했습니다. 가령 초기에는 옥스 등 그룹 사운드의 곡을 썼는데 멜로디는 가요곡스러움 자체. 그 연장선상에 '블루 라이드 요코하마' 같은 게 있습니다. 그것도 가요곡이지만 사운드적으로는 바카락스럽죠. 하지만 바카락 그 자체로 일본의 가요곡으로서는 난해해져요. 제가 만든 곡 중에 마음에 드는것은 음, '다시 만날 그 날까지(また逢う日まで)', '안녕 연인이여(さらば恋人)', '무명 손수건(木綿のハンカチーフ)' 같은것들일까요? 당시에는 카펜터즈같이 하나의 장르로서 성립하는 새로운 음악이 실시간으로 나오는 시대였으니까요. 좋은 의미로 충격이 커서 한 사람의 팬으로서, 한 사람의 프로로서 굉장히 자주 들었습니다.
댄스뮤직과 일본의 가요곡의 관계는 깊어요. 가령 소울 뮤직중에도 오제이즈(O'Jays)등의 필리(필라델피아)소울을 좋아했는데 소울이라고 해도 팝적인 음악이고 일본의 가요곡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오티스 레딩이라던가 블루스같은 음악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요. 일본에서 블루스적인 음악을 메인 스트림으로 하는것은 무리가 있다고 봅니다. 코무로 테츠야군이 한 때 하던 유로비트. 그것도 댄스뮤직으로서 붐이 일었었죠. 아티스트로는 오기노메씨가 나와서 히트작을 연발했습니다.
곡 만들기는 팀워크, 가수와 함께 '뛰어오르는'듯한 형태가 이상적 제작현장에서는 잘 팔리는 탤런트가 되면 될수록 주변의 스탭이 여유가 없어요. '다음은 어떻게 할까요?'같은. 70년대에는 한 가지의 작품을 발매할때까지는 만드는 사람과 파는 사람의 역할분담이 확실해서 작사가, 작곡가, 어레인저, 판매자가 하나가 되서 하나의 '회사'같은 느낌으로 임했습니다. 혼자하는거보다 팀워크로 하는 편이 몇배나 든든해요, 신기하게도. 당시에는 농담으로 이런말을 했는데 우리들은 '일본가요회사'에 근무하는 샐러리맨입니다, 라고(웃음).
오리콘이 생긴 이후, 유선방송에서의 방송횟수, 판매장수등의 데이터가 표로 나오게 되면서 제작측의 인간은 모두 그 숫자에 사로잡혀서 소용돌이속에 있는 것 같았습니다. 옹천옥(쥬디 옹)의 '매혹시켜줘(魅せられて)'의 경우에는 당시 소니의 오가 사장으로부터 '반드시 레코드 대상을 거머쥔다'라는 지상명령이 나와서 그걸로 회사전체가 움직이니 열의는 굉장했어요. 어쨌든 곡을 쓸 때는 중박이던 대박이던 베스트10에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만든 곡이 인기를 못 끌어도 실패의 원인분석은 하지 않습니다. 주변의 스탭이 '자자 다음! 그 다음!' 같은 분위기라서요(웃음). 지금은 일반적으로 한 명의 아티스트가 싱글을 내는것은 연 2장 단위이지만 예전에는 TV출연 관계로 3개월 주기로 발매했으니까 속도가 엄청났지요.
프로로서 곡을 만드는 가운데 1곡이 히트하면 2곡째, 3곡째도 히트시키고 싶게되요. 작곡가만이 아닌 탤런트분도 현역때에는 지금의 인기가 영원히 이어질거라고 생각해요. 이상하지만 그런것이지요. 지금의 음악은 싱어송라이터가 많아서 츤쿠씨같이 작사·곡·프로듀스까지 혼자서 전부하는 시대잖아요? 그렇지 않으면 '작업'의 색깔이 나오지 않아요. 하지만 이건 시대적인것이 크다고 생각해요. 지금의 리스너가 추구하는것도 '노래'보다도 (아티스트의) 개성이나 멋 같은게 아닐까요? 제 감각으로는 '작품'의 퀄리티도 높고 '노래'도 굉장하고 가수와 함께 '뛰어오르는'듯한 형태가 이상적입니다.
젊은 아티스트와의 작업은 굉장한 즐거움 1990년대에 들어와서 오자와 켄지군이나 피치카토 파이브의 코니시 야스하루군 등 젊은 아티스트와 작업을 하게됐습니다만 굉장한 즐거움입니다. '(코드 진행등에서) 과연, 이런식으로 만드는구나!' 라는 발견이 있어요. 힙합이나 포크 등 다른 장르의 음악을 하더라도 빠른 말놀림으로 어휘를 반복하거나 하는 지금의 세대가 특징적으로 가진 공통분모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뉴 뮤직계의 아티스트와 작업을 할 때에는 다른편의 음악을 어떻게 소화할까 생각합니다. 가요곡의 필드에서 만든 저의 멜로디를 어떻게 그쪽의 사운드에 덧씌울지 고민하는 작업입니다.
옛날에는 뉴 뮤직계VS가요곡이라는 구도가 만들어졌습니다만(웃음), 지금은 그다지 그런것도 없지요. 러브 사이키델리코나 드래곤 애쉬 등을 듣고 있으면 해외의 사운드구나하고 생각합니다. 기술적으로 딸렸던 70년대에는 해외의 사운드를 만들고싶어도 할 수 없었던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후, 저희같은 직업작가가 뭔가 어려운것이나 새로운것을 하려고 하면 어지간히 말이 통하지 않았어요. '어떻게 된 건 아냐?' 라고 반문하니까요(웃음).
직업작가로서의 사명은 히트상품을 만드는 것 팝 뮤직을 만드는데는 거리라던가 미디어에 안테나를 달아 자신의 음악과 타인의 음악이 싸우는듯한 긴장감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저희같은 직업작가는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만드는것이 역할이 아니라 히트상품을 만드는것이 사명이니까요. 지금은 재즈라던가 보사노바, 보사노바와 소울같은 여러 요소를 믹스한 음악이 나오잖아요. 자신은 이런것이 재밌다고 여겨도 젊은 사람이 이미 새로운것을 내놓아요. 가령 포르노그라피티 등 젊은 밴드는 어떻게하면 팔릴지를 신속하게 탐지하고 자신들이 히트상품을 만드니까요.
제 자신은 최근에 음악을 들을때에도 프로로서가 아닌 한 명의 팬이라고 해야되나 보통사람에 가까운 감각이 되버렸어요(웃음). 즉 자신들이 만들어서 세상에 내놓은 '노래'가 그 시절의 젊은 세대에게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만들어준것처럼 저도 한창 젊을 때 들은 노래를 솔직하게 그리워하고 사랑하고 서운한 마음이 들게 된 것입니다. 이른바 직업작곡가, 작사가라 불리는 사람들은 물론 지금도 많은 활약을 하지만 팝 뮤직의 세계에서는 가사만으로 곡만으로는 조금 형체가 희미해졌다고 생각되는게 지금의 실정입니다. 퇴직의 기회가 보이지 않고 고민하고 있는 요즘입니다(웃음).
Copyright ⓒ 2002 JASRAC All Rights Reserved.
출처:
JASRAC